기획 노동이라는 이름 없는 일
찬비 "왜 이렇게 4분기가 춥죠 🥶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 계속 외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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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에디터 찬비입니다.
최근에 에픽하이와 다비치가 함께 나온 영상을 재미있게 보다가 잠시 멈칫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강민경이 ‘왜 남자들은 정확하게 지령을 줘야 하냐’고 물었고, 에픽하이 세 멤버 모두 그게 필요하다고 말하더라고요. 타블로는 그 이유로 ‘우리가 좀 멍청하다’고 했고, 미쓰라진은 ‘초반에 의견을 제시했다가 거절당하면 말을 안 하게 된다’고 했어요. 투컷은 그러니 ‘시작과 끝을 다 입력해 주면 수행은 끝내주게 할 자신이 있다’고도 했고요. 그게 정말일까요? 남자들은 정말 하나하나 다 입력해야만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걸까요?
2년 전, 왜 이렇게 시간이 없을지 생각하며 쓴 레터에서도 집안일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저는 항상 집안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그땐 혼자 살았는데, 지금은 가구원이 두 명이에요.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살다 보니 확실히 집안일하는 시간은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집안일에 관한 생각은 제가 더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평소엔 괜찮다가 갑자기 계획하고 결정할 것들이 확 몰릴 때 ‘왜 이걸 나만 해?’하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날들이 생겼습니다.
머리로 하는 집안일, 그걸 기획 노동이라고 한다고 해요. 오늘은 책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와 함께 기획 노동에 대해서, 2인 이상의 가구에서 평화로운 집안일 분배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책의 내용에 따라 본 레터에서는 이성 커플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며 퀴어 커플의 이야기는 세 번째 파트에서 별도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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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도 집안일에 포함해주세요
2. 왜 기획 노동은 대체로 여자가 할까
3. 반반으로 나누는 게 정답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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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노동은 정확히 뭘까요? 책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에서는 기획 노동*을 모든 가족구성원의 욕구 충족을 보장하려는 일단의 정신적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요, 크게 네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문제 예상하기입니다. 갑자기 SNS를 보다가 떠오르는 생각일 수도 있고, 이맘때쯤 해온 일이라서 생각이 날 수도 있어요. ‘명절 전에 선물을 사야 한다’, ‘이제 가을옷을 정리하고 겨울옷을 꺼내야 한다’, ‘우유가 다 떨어졌다’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면 바로 이 단계입니다. 주로 스마트폰 알림이 오는 것처럼 정말 뜬금없이 떠올라서 마음을 괴롭히는 그런 단계라고 책에서는 설명해요.
두 번째는 선택지 확인하기입니다. 위에서 예상한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간단하게는 내일 아침 메뉴를 고민하는 것부터 복잡하게는 아이가 갈 어린이집을 찾는 것까지가 이 단계에 포함됩니다. 만약 어린이집이라면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고, 온라인 사이트에서 정보와 리뷰를 살펴보고, 백방으로 정보를 찾고 비교하는 표를 작성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포함됩니다.
세 번째는 결정하기입니다. 위에서 만든 선택지 중 하나를 결정하는 거예요. 사안에 따라 금방 결정할 수도 오래 고민할 수도 있고, 혼자 내리는 결정일 때도 누군가와 함께 내리는 결정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과 지켜보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결정이 내린 대로 잘 흘러갔는지 체크하는 것입니다. 특히, 위에서 결정한 걸 내가 직접 실행하지 못할 때는 상대방이 이 결정을 잘 수행했는지, 그래서 목적을 잘 성취했는지 확인합니다. 만약 성취하지 못했다면 다시 앞의 어딘가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이 중에서 가장 눈에 잘 띄고 성취감이 있는 단계는 결정하기라고 합니다. 곧바로 실행으로 이어지니 누가 했는지가 분명하고 인정받기도 쉽죠. 반대로 시간과 노력은 많이 들어가는데 잘 보이지 않는 단계는 예상하기와 지켜보기입니다. “절대 완료되지 않고, 예정할 수 없으며, 대체로 눈에 띄지도 않”(106쪽)기 때문입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을 때에야 눈에 띄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므로 항상 생각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책에 따르면 결정하기와 선택지 확인하기는 어느 정도 분배해서 진행되더라도 예상하기와 지켜보기는 여성이 담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획 노동은 머릿속에서 수시로 일어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분을 썼다고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가사 연구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요리와 청소 같은 구체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며, 여전히 압도적으로 가사 부담을 시와 분 단위로 측정하고 있”(60쪽)죠. 집안일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그 복잡성과 미묘함을 들어내버린 것입니다. 종종 집안일에 대한 통계를 인용하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그 기사가 가리키는 데이터에는 대체로 기획 노동을 포함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죠.
국내에서는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연구 ‘가사노동시간 측정 및 행동평가 기준의 젠더불평등성 개선방안’에서 기획 노동이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했어요. 이 연구 역시 집안일을 기획노동과 실행노동으로 나누고, 매일 하는 일뿐 아니라 가끔 하는 일까지 포함해 측정해야 한다고 제안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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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로서도 기획 노동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사람이 늘어나면 집안일의 양과 난이도는 배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아이가 있진 않지만, 결혼식을 준비할 때 체험을 해봤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유자녀 구독자 여러분). 결혼식 당사자 둘뿐 아니라 양가 부모님의 일정까지 고려해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타임라인을 정하고, 선택지를 만들고, 잘 진행되고 있는지 체크하는 일련의 과정은 저 혼자 하는 것이랑은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게다가 계획하고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할당한 인원이 잘 수행했는지 체크하는 것까지 들어오니 더 고역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기획 노동은 결과 지켜보기였어요. 진작에 할 수 있는 거라면 이미 처리했겠지만 지켜봐야 한다는 건 제가 할 수 없다는 의미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했는지 체크하고 상기하고 또 돌아와서 체크하는 것뿐이더라고요. 수많은 알림이 울리면서 이거 했나? 저거 했나? 계속 생각이 떠오르는데 이미 결정을 내린 사안에 대해서도 진행 여부를 체크해야 한다는 것, 인지적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사람을 돌아버리게도 만든다는 것을 이때 알았습니다…
책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를 읽고 주변 기혼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기획 노동을 각각 어느 정도 담당하는 것 같냐고요.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답했는데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었어요.
첫 번째는 각자 더 잘 챙기는 영역을 담당한다는 유형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본인이 집 안의 계획이나 주방을 주로 담당한다면 남편은 주로 재테크나 집 안 정리 같은 걸 담당한다고 했어요.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본인이 더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했고요. 다른 친구는 일정 계획이 필요한 부분은 남편이 하고, 샴푸나 치약같이 개인 선호가 들어가는 부분에 대한 준비는 아내가 담당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 두 번째 유형에 해당했는데, 생각해 보니 아내가 기획 노동을 거의 담당한다는 쪽이었어요. 한 친구는 남편이 의견은 많이 주지만 실제 일을 추진하는 것은 본인이라고 했어요. 다른 친구는 남편이 실행을 주로 담당하고 아내는 PM처럼 진두지휘하는 역할로 생각한다고 했어요. 다만, 구매할 것들은 링크를 주는 등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의 경우도 두 번째 유형인데, 실행 노동은 7-80% 배우자가 하지만, 때에 맞춰 새로 해야 할 것들을 아젠다에 올리고 실행할 일자를 정하는 것은 주로 제가 합니다.
두 번째 유형의 친구들에게 왜 여성이 기획 노동을 하는 것 같냐고 물었을 땐 다들 성격을 이유로 들었어요. 여성이 더 계획적인 성격이고 더 잘 챙기기 때문에, 대신 남성이 실행을 더 잘하면 어느 정도 균형이 맞는다고요. 저도 같은 케이스였어요. 저는 새로운 문제를 찾아서 아이디어를 던지고 추진하는 걸 잘했다면 배우자는 정해진 틀 안에서 루틴하게 움직이는 것을 저보다 훨씬 잘 하더라고요. 그래서 큰 기획은 제가 하고, 루틴한 일은 배우자가 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 틀을 정해둔 차였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정말 그게 성격 때문이겠냐고 질문을 던지더라고요?
*책에서는 인지 노동(cognitive labor)이라고 하지만, 국내에서는 기획 노동이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기에 레터에서는 기획 노동으로 대체하여 이야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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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슨 데이밍거는 아이가 있는 커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유자녀 커플을 대상으로 한 이유는 생의 주기에서 비슷한 시기에 있는 가정으로 한정하기 위함과 동시에 이 시기에는 집안일의 양이 많이 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정량적인 연구 방식에서는 기획 노동을 측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데이밍거는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정성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기획 노동을 아내가 주로 맡는 ‘여성 주도’ 커플이 전체 이성 커플의 약 80%였습니다. 책에는 커플들의 인터뷰가 직접 인용으로 담겨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절망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웃기고 슬펐습니다…
“남편은 미리 생각하는 법이 없어요! 정말 좌절감이 느껴진다니까요. 애들하고 뭘 하라고 제가 말하지 않으면 먼저 알아서 하질 않아요. 날이 아무리 좋아도 그냥 집 안에만 앉아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이는 그냥 기타나 치고…… 그러면 제가 “난 할 일이 있으니까 당신이 애들하고 이걸 좀 해줘. 이게 당신이 할 일이야”라고 말해요. 말을 하지 않아도 좀 주도적으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매번 제가 말해야 하니 미칠 것 같아요.” (91-9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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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성이 더 주도하는 것 같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커플이 다들 성별이 아닌 성격을 이유로 들었어요. (성별 때문이냐고 물었을 때도 명시적으로 성별 때문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아내가 더 조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초인’이고, 남편이 더 산만하고 계획적 요령이 부족하고 느긋한 ‘허당’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여성이 더 기획노동과 잘 맞는다는 거죠.
하지만 성격만으로 설명하기엔 기획노동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고용 상태로 나눠 봐도 그랬어요. 남성이 더 많이, 더 오래 일하는 커플에서는 93%가 여성 주도였는데, 여성이 더 많이, 더 오래 일하는 커플에서도 63%가 여전히 여성 주도였습니다. 일하는 시간이 기울어진 방향을 뒤집어도 과반은 그대로였던 거죠. 회사에서 기획은 업으로 하는 남성의 집에서도 기획은 아내가 더 많이 했고요. 설령 실제로는 여성이 더 계획적이라 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데이밍거는 이를 ‘성격 본질주의’라고 부르는데, 평등하게 집안일을 나누고 싶은 이상이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칠 때 이러한 충돌을 완화할 수 있는 핵심 서사로서 작용한다고 해석했어요. 하지만 커플들이 성차가 아니라 변할 수 없는 개인의 속성에서 이유를 찾으면서 결국 그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유지하게 되어버립니다. 성격 때문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사람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인지적 부조화는 해소할 수 있지만 당장의 불편한 현실을 가려버리는 거죠.
여성이 기획 노동을 주도하는 이유로 데이밍거가 제시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별에 따라 주로 집중하도록 기대되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성은 주로 아이의 발달에 대해 잘 알 것이라고 기대되고, 다른 학부모와 친분을 쌓고 어린이집/학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주로 여성이 담당합니다. 기대에 따라 여성이 실제로 이 분야에 시간을 투자하게 되면 더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본인이 맡는 것이 당연해지게 됩니다. 남성에게 이런 분야는 재테크나 집안 유지보수가 있습니다. 남성이 하리라 기대되고, 그래서 남성이 여성보다 시간을 더 투자하고, 그렇게 되니 더 잘하게 되고, 잘하니까 더 맡게 되는 구조도 동일합니다.
두 번째로, 실제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성별에 따라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이라고 느끼는 분야도 다릅니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 똑같이 어질러진 방을 보여주고 방 주인의 성별만 바꿔 제시했더니, 주인이 여성일 때 방이 더 지저분하고 방문객에게도 덜 긍정적일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어수선함은 같은데 책임의 무게가 달랐던 거죠. 그러니 아이가 단정하지 못한 차림으로 등교하는 걸 더 불안해하는 건 주로 엄마고, 반대로 (미국에서는) 마당 조경이 엉망이면 남성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사회적인 기대에 따라 여성과 남성은 각각 자신의 능력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회사에서는 계획하는 일을 하는 남성도 집에서는 여성의 계획에 기대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직장과 가정에서의 페르소나가 다른 것에 대해 인터뷰이는 회사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여성은 집에서의 기획 노동으로 인해 인지적인 에너지가 소진되는데, 이를 문제라고 생각하기보다 업무를 조정하는 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정의 다른 부분에서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여성도 재정이나 집을 고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한 발 물러나 있기도 했고요.
세 가지를 이야기했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네요. 사회적인 인식입니다. 성별에 따라 사회적으로 맡기를 요구되는 영역이 있고, 잘못되었을 때 책임이 쏠리는 영역이 있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커플은 이러한 사회적인 인식을 내면화해서 자신의 가정에도 적용하고, 쉽게 해결되지 않으면 성격 차이로 인식하고 납득해버리는 것이죠. 배분 방식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성격을 바꾸지 않는 한 고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안주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민경의 질문에 답해보자면, 남자들에게 정확한 지령이 필요한 이유는 정말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에게 지령을 달라고 상대에게 맡겨왔기 때문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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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기획 노동도 잘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반반 나누는 게 정답일까요? 이 답을 확인하기 위해 재미있게도 데이밍거는 퀴어 커플을 인터뷰합니다. 기획 노동이 치우친 이유가 사회적 인식에 따른 성별 차이라면 성별 차이가 적용되지 않는 퀴어 커플의 경향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죠. 퀴어 커플이 어떻게 기획 노동을 나누고 있는지 참고해서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니까요.
퀴어 커플 중에서도 기획 노동을 동등하지 않게 분담하는 불균형 커플이 72%로 과반이었어요. 퀴어 커플도 반반은 아니었던 거죠. 다만, 담당하는 기획 노동의 격차는 여성 주도 커플 대비 작았고, 담당하는 과업도 소위 남성의 영역, 여성의 영역과 상관없이 나누고 있었다고 해요. 상대가 더 남성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그가 기획 노동을 더 많이 맡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엄마를 담당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기획 노동을 덜 담당하는 식으로 사회에서 흔히 보는 성별 역할과는 다른 면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당연한’ 것이 없기 때문일 것 같아요. 으레 OO라면 XX를 해야지 같은 기대가 없어서 퀴어 커플은 누가 무엇을 담당할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눠야 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했던 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었을 거고요. 아이를 갖는 것 역시 퀴어 커플에게는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육아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전에 더 충분히 논의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퀴어 커플에게 기획 노동에 대한 인터뷰를 했을 때 이성 커플과의 다른 점은 언제든 기획 노동의 담당을 조정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불만이 있다면 계속해서 맞춰 나가는 형식으로 조정하겠다고 했어요. 물론, 기획 노동을 동등하게 배분하기 위해서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겠지만, 결국 각 개인의 차원에서는 성별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충분히 대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성 커플과 퀴어 커플을 가른 건 조정 가능성이었던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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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자’, 말로는 참 쉬운 일인 것 같은데, 저도 실제로 해봤을 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두 사람이 같은 페이지에 있어야 가능하겠더라고요. 위에서 제가 지켜보기를 제일 싫어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왕 배우자에게 요청한 거, 수행하고 결과가 나오면 바로바로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예시를 들면서요. 배우자는 그냥 물어보면 알려줄 텐데 왜 그걸 그렇게 바로바로 말해야 하느냐고 답하더라고요. 화도 내보고 짜증도 내보고 절망하기도 했지만, 저때 바로는 해결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지켜보기를 극혐했기 때문에 지난 1년간 이 문제를 수도 없이 이야기했어요. 제가 얻은 정보를 전달하지 않아 보기도 하고, 전달하면서 ‘자, 이렇게 주니까 좋지!’ 하기도 하고요. 그 결과 지금은 (드디어!) 본인이 얻은 정보를 바로바로 전달해 주게 되었습니다. 저야 이 문제를 너무나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에 무한한 에너지를 쏟아서 해낼 수 있었지만… 상대방이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화를 거절한다면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책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에서 제안한 방식도 좋아 보였습니다. 바로 기획과 실행을 나누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이 담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책의 한 커플은 남편이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아내가 복직하면서 남편이 모든 살림을 도맡게 되었는데, 그제야 육아와 집안일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많다는 것을 깨닫고 태도가 달라졌다고 해요. 6개월간의 육아휴직 결과 살림과 돌봄이 비교적 공평하게 분배되었다고 느낀다고요.
육아휴직을 쓰는 것이 어렵다면 아예 합의로 영역을 나누는 방식도 제안합니다. 미국 변호사 이브 로드스키가 제안한 ‘페어플레이’ 방식인데요, 실행 노동과 기획 노동을 총망라한 100장의 카드를 두고 자신이 담당할 카드를 정하고, 카드마다 ‘최소한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수준을 합의합니다. 담당하는 카드는 계획부터 실행까지 담당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장보기 카드를 맡았다면 많이 쓰는 식재료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인지), 장 볼 계획을 세우고(계획), 실제 장 본 뒤 냉장고에 넣는 것(실행)까지 전 과정을 맡아야 하는 거죠. 복잡할 수는 있지만 집안일을 가시화하고 논의할 수 있는 시작점으로서 좋은 도구 같았어요.
특히, 최소 기준을 미리 합의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미쓰라진의 말처럼 의견을 냈다가 거절당하면 말을 안 하게 되는 건, 결국 기준을 한 사람이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잖아요. 기준을 함께 정해두면 맡은 사람은 그 안에서 자기 방식대로 해도 되고, 맡긴 사람은 일일이 지켜보지 않아도 됩니다. 기획을 쥐고 있던 쪽은 손을 놓을 수 있고, 실행만 하던 쪽은 처음부터 손을 대볼 수 있는 구조인 거죠.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반반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맡을지를 언제든 다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함께 갖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요. 모든 것을 대화를 통해 조정한다는 것이 귀찮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날들도 많겠지만, 결국 가정의 행복이 삶의 질에 직결되는걸요. 그 정도 투자는 해볼 만하지 않나요? 2인 이상의 가구인 구독자 여러분께, 여러분의 가구 구성은 어떻게 되는지, 기획 노동을 어느 정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피드백으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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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찬비>의 코멘트
지난 주말에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한 손열음 피아노 리사이틀에 다녀왔어요. 피아니스트로서는 거장으로 알려졌지만, 작곡가로서는 덜 알려진 이들의 곡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어요. 프로그램북에는 본인이 직접 쓴 글로 각 곡을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읽고 들으면서 새로운 음악을 알아가는 경험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앵콜로 11곡이나 연주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놀라웠어요! 때에 따라 이렇게 길게 앵콜을 하시기도 하나보더라고요. 앵콜 곡 중 익숙한 테마가 포함되어 있어 귀에 더 잘 들어왔던 곡을 추천합니다. 영상에서는 악보 언박싱부터 연주까지 있으니 쭉 들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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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oe • 구현모 • 찬비 • 오리진 • 요니 • 장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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