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이 아닙니다. 로봇이 아니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에디터 요니입니다.
7월의 어느 날, 여느 퇴근길처럼 뇌를 빼고 SNS를 보다 올해 5월 출간된 ⟪경험의 멸종⟫과 관련한 출판사 어크로스 계정의 게시물 추천 탭에서 마주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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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맞아. 나도 애플워치 배터리 없으면 운동 안 하는데." 낄낄대며 어크로스의 게시물을 쭈욱 스크롤 해 내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게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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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저자 크리스틴 로젠은 경험이 소멸하는 21세기적 현상을 탐구하고 그 소멸이 갖는 의미를 철학적으로 분석합니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여섯 가지의 경험, 구체적으로 대면 상호작용, 육체성, 기다림, 감정, 쾌락, 장소가 인간에게 무슨 의미였는지, 그것이 미디어와 기술, AI를 만나 어떻게 변해가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합니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일상에서 문득 머릿속을 스친 여러 위화감이 구체화되는 걸 느꼈습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기술, 미디어, AI와 꽤나 가까운 직장인으로서, 경험에 관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과 그것을 인간답게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 낸 저만의 답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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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런 기술적 도움 없이 창작했던 적은 언제인가?
2. 최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나? 3. 세상의 사건에 순식간에, 과도하게 반응하고 있진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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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기술적 도움 없이 창작했던 적은 언제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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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성과 사고: 도구는 몸의 일부가 되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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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IT 기획자입니다. 출근해서 사무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모니터 한쪽에 생성형 AI 창을 띄워 두고 일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에러 로그를 해석할 때 개발자보다 GPT에게 먼저 묻고, 기획서를 쓰다가도 더 보완할 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데이터 분석할 때도, 보고서 쓸 때도 참 유용하게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아가고 있지만, 때때로 AI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자신에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기획서를 쓰면서 막히는 부분이 있어 바로 chat GPT에 보완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이 부분은 이렇게 고쳐봐. 저 부분은 저런 방향으로 수정하면 좋겠고.” 이렇게 계속 피드백을 주며 만들어낸 결과물을 시간이 좀 지나고서 다시 읽었을 때의 인상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획서를 쓰는 동안 저는 생각의 중심을 가지고 무엇을 써 내려갔다기보다는, 싫은 점만을 지적하면서 부딪히는 부분 없게 문서를 깎았다고 밖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도구는 몸의 일부가 됩니다. GPS와 내비게이션이 인간의 공간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듯이, 디지털 도구와 생성형 AI도 사고하는 방식의 변형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 찬양론자들은 이러한 사고 방식의 변화 역시 기술 발전의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저는 모든 변화가 100%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기술이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만 확인하지 말고,
그 기술이 무엇을 차단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 현명하다.”
생성형 AI를 과도하게 활용한 때 사고 과정에서 무엇이 차단될까요?
첫 번째, 끝까지 생각하는 일입니다. 생각의 길이 막혔을 때 잠깐 고민해 보고는 바로 AI와의 대화창을 찾게 됩니다. AI는 사람과의 대화와는 달리, 무언가 완성하고 결론을 만들어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민되는 지점에 대해서 옆자리 동료에게 조언을 얻는 경우에는 좋은 실마리를 얻거나, 열린 결말로 마무리 지어지는 등 여러 방향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AI와 대화하다 보면 알맹이 없는 결론이 나오기 쉽습니다. AI가 정리한 일련의 이야기는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와의 대화를 성급히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사고를 통해 완결된 생각의 흐름을 만들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풋을 충분히 소화하는 일입니다. 책을 읽을 때보다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와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미디어 스크롤 하면서 인풋을 받기만 했을 때 우리의 뇌는 충분한 소화과정 없이 남의 인용과 의견을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마련입니다. 뉴스 기사에서, 인스타그램에서 읽은 누군가의 의견을 필터 없이 받아들이고, 소화할 시간도 없이 계속 먹어 치우다 보면 생각의 중심이 사라집니다. 천천히 생각해 볼 시간을 스스로 차단하게 되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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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단 한 번의 승리를 이끌어낸 묘수, 78수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알파고는 한 수를 둘 때 제한 시간을 50초로 두고 있어, 이세돌 9단이 놓은 에러와 같은 수에 충분한 계산 시간을 갖지 못하고 50초 만에 착수를 해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더 나을 수 있는 방법은, 감정을 다스리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해결책을 고찰하는 능력일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디어와 AI에 사고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저는 일과 일상에서 두 가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 1 pager 기획서를 생성형 AI 없이 끝까지 작성한다. 그다음에 AI의 도움을 받아 확장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본다. (*1 pager: 한 장 안에 기획의 배경과 해결할 문제까지 모두 담긴 간략한 기획 문서)
✅ 출퇴근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고, 걸어서 이동하는 과정에는 읽은 내용에 대해 생각한다. 이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지 않고 생각에 집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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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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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 쾌락: 기술은 기다림과 기대를 외주 주고 위험성이 제거된 쾌락에 인간을 길들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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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2주간의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면서 유튜브, 네이버 카페, 인스타그램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여행을 목격했습니다. 세비야 여행할 때 꼭 알아야 할 N가지, 스페인 신혼여행 필수 코스, 바르셀로나 예약 필수 5대 맛집, 놓치면 안 되는 석양 포토스팟… 파워J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행을 완벽하고, 매끄럽고, 비효율 없이 준비할 수 있는 법을 빈틈없는 체크리스트로 만들어서 블로그에 게시합니다. 여행 크리에이터들의 1분짜리 편집된 릴스 동영상은 스페인의 아름다운 길거리 풍경과 맛있어 보이는 음식,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여행 경험을 담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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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에서는 치명성 제거(delethalization)이란 개념을 소개합니다. 미디어에 표출되는 경험은 소비하는 사람들의 선호를 위해 너무 현실적이거나 통제할 수 없거나 위험한 부분은 제거되고, 더 쉽게 소화되고 공유될 수 있는 형태로 여과된다는 것입니다.
치명성이 제거된 타인의 경험을 미디어를 통해 접하면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효율적이고 매끄럽고 편안함만 있는 여행에 대한 강박을 갖게 됩니다. 어떤 여행,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기대감이 가득해야 할 여행 준비 과정에서 좋은 것들을 놓치지 않겠다는 불안감으로 여행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지요. 강박과 불안은 지나친 계획과 통제로 이어져, 구글 맵과 옐프(Yelp), 여행 카페, 인스타그램에 좋은 후기가 있는 곳들만 모아 빼곡히 여행 계획을 채우게 됩니다.
이런 강박은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이어집니다. 방문하려 했던 카페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수 없을 때 길거리에서 구글 맵을 켜서 별점이 높은 주변의 다른 카페를 황급히 검색합니다. 엑셀에, 노션에 담아둔 시간대별 방문 장소를 착실하게 따라다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추천하거나 평가하거나 순위를 매기지 않은 대상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경험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시대의 드러나지 않은 공포다.”
나에게 도달하는 기술적 추천이나 체크리스트 따위는 나라는 사람의 한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자주 대화하는 친구들, 자주 보는 SNS 계정, 매일 좋아요 누르는 인플루언서가, 나의 개인정보를 알고 있고 클릭과 탐색과 좋아요의 로그를 초 단위로 분석하는 인스타그램이 추천해 주는 무엇. 새로운 경험을 쌓고 세계를 넓히는 것이 아닌, 익숙하고 실패 없는 매끄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는 게 더 알맞을 것 같습니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방문하고 나서, 여행 가이드에게 추천을 받은 식당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식당에서는 메뉴별 리뷰를 확인하지 않고 오늘의 메뉴(Menu del Dia, 스페인에서 평일 점심에 전채, 메인, 디저트로 구성된 코스를 저렴하게 내놓는 문화)를 주문했습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아몬드로 만든 수프와 생선 요리, 안달루시아식 디저트는 2주간의 여행 중 먹었던 어떤 식사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의외의 즐거움을 남겨주었습니다. (물론, 그 코스 중 하나는 평이해서 기억도 안 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행을 하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 의외성 있는 진짜 경험을 위해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나의 세상을 확장하기 위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 보는 건 어떤가요?
✅ 투두리스트가 아닌 최소한의 머스트 두 리스트를 만든다. 반드시 해야 하는 항목을 제외하고는 열어 두고 움직인다.
✅ 모르는, 당혹스러운, 통제할 수 없는, 실패 가능성 있는 것을 시도한다.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 하더라도, 실망이 아닌 의외의 경험으로 남겨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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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사건에 순식간에, 과도하게 반응하고 있진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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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면 상호작용, 감정: 간접경험은 감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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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도, 정치인도 아닌 일반인의 일인데도 크게 화제가 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2021년에 있었던 모 은행 불륜 사건이 기억에 남는데요. 지극히 평범한 개인 간의 불미스러운 사건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폭로된 그들의 카톡 대화를 읽으며 경악하고, 비웃고, 당사자들을 조롱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일하는 직장에까지 민원을 넣어 가며 응징하기까지 했습니다. 유명한 카톡 대화는 밈화되어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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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일들은 너무나 일반화되었습니다. 새로운 ‘디질란테(digilante, 디지털과 비질란테(자경단 단원)를 합성한 말)’식의 정의는 과거라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말았을 실수에 대해 이제는 전국적, 전 세계적 범위의 즉각적인 보복을 가합니다.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반응적 표현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감정적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습니다. 즉각적, 동시적으로 감정이 전염되고 통제 불능이 됩니다.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으니, 비난을 폭격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쉽게 이입해서 분노하고, 보복하고, 비난하며, 죄책감 없이 쉽게 빠져나옵니다.
간접경험을 통해 과다하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면 이미 직접 겪어본 것처럼 여기고 실제 경험을 피하게 됩니다.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의 실패한 인생을 간접경험 한 사람은 스스로 겪어보지도 않은 결혼생활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내립니다. 남들의 사소한 에피소드를 보게 되더라도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했냐),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며 납작한 결론의 댓글을 달고 글을 빠져나옵니다. 가상의 영역에서 배운 것으로 현실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접하는 이야기들을 보고 동정하거나, 분노하거나, 부러움을 느끼고, 자기 생각을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즉각적이고 동시적인 감정 전염은 사람들 간의 현실 세계에서의 대면 상호작용에도 분명히 영향을 끼칠 겁니다. 저는 종종 직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과하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당혹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그다지 큰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짜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 감정을 친한 사람들과의 대화방에서 표출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사소한 불쾌감을 주었을 때도 많았을 거고, 지나고 보면 별 큰일도 아니었을 텐데 순간적인 감정 표출을 참지 못한 자신이 괜히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감정을 충분히 인지하고 조정하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 감정을 바로 표출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곱씹는다. 감정과 말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계속 상기한다.
✅ 모르는 사람의 실수나 불행한 이야기는 못 들은 것처럼 지나친다. 쉽게 비난하거나 연민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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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서 ‘경험’은 ‘쌓이다’라는 동사와 함께 짝을 이루어 표현됩니다. 경험은 시간의 흐름에 엮여 있고,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죠. ⟪우리말 어감사전⟫에서는 경험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깊은 통찰력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삶은, 아니 우리 자신은 무수한 경험의 조각으로 쌓아 올린 축적물일지도 모른다. 경험 없이, 경험에 대한 성찰 없이 어찌 삶의 문양을 다채롭게 직조할 수 있을 것인가?
정체성의 축적을 나의 선택이 아닌 기술이 조합해 낸 알고리즘에 맡긴다는 거, 생각해 보면 조금 오싹하지 않으신가요. AI 때문에 사라질 직업 10위 따위의 뉴스 기사를 읽을 것이 아니라, AI와 미디어 때문에 사라질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더 경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늘 얼마나 인간다운 경험을 하셨나요? 어떤 의식적인 노력이 인간다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나요? 여러분만의 방법도 찾아보시길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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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요니>의 코멘트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함께 보게 된 레게 밴드의 곡입니다. 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데다 익숙하지 않은 레게 장르였지만 공연을 보는 동안 점점 빠져들어버렸어요. 이런 의외의 발견이 정말 소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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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업문의 augustletter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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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oe • 구현모 • 찬비 • 오리진 • 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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