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주의자의 길티 플레저 지금을 읽고 싶은 사람들의 미디어 이야기, 어거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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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에디터 Friday입니다.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잘한 일은 잘 떠오르지 않고 후회되는 일만 가득해서 조금 서글픕니다.
하지만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혼을 빼놓았던 책과 드라마와 영화들이 남았습니다. 지금도 재밌게 보고 있는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도 그 중 하나입니다. 대체 왜 이렇게 재밌는 걸까요?
누구나 해봤을 짜릿한 상상에 그걸 살리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흡입력 있는 연출까지 흥행 요소는 많지만 저는 이 드라마의 인기 요인 중 하나로, ‘PC하지 않아서’라는 PC하지 않은 의견을 내놓아봅니다. 그럼 저의 가설을 한 번 읽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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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에디터 : Friday
불편한 게 너무 많아 PC마저 불편해져버린 PC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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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1. 정치적 올바름과 캔슬 컬처 2. 콘텐츠는 어떻게 PC를 흡수했나 3. 백래쉬를 이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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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Political Correctness)는 정치적 올바름(이하 PC)을 말합니다. 공격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최소화하는 언어 혹은 표현을 일컫는 것으로, 특히 인종, 성별, 문화, 성적 지향 등을 묘사할 때 쓰입니다. 주류 혹은 다수의 테두리 밖에 있는 존재들이 소외 당하지 않게 차별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PC주의자는 언어가 신념을 바꾸고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사전 <Britannica>의 설명에 따르면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17년 러시아 혁명 때입니다. 그땐 소련 공산당의 규칙을 고수하고 무엇이 ‘공산당 정치에 올바른지’를 가려내는 데 쓰였습니다. 공산당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이었죠.
그러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PC라는 용어는 진보 정치인들 사이에서 유희의 말투로 쓰였습니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가 성차별주의자 연예인을 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 있는데, 저 남자 진짜 잘생기긴 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과 서로의 진보성에 대한 농담 같은 것이었죠.
1990년에 들어서 변화가 생깁니다. 대학 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발언이나 행동을 한 교수진이 징계를 받거나 쫓겨나고, 진보주의적인 커리큘럼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PC때문에 ‘침묵당한다’는 것이죠.
보수주의자들이 우려했던대로, 아니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절실했을,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Cancel Culture, 취소 문화(이하 캔슬 컬처)의 바람이 분 것이죠. 이는 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 혹은 공인을 대상으로, 논쟁거리가 될 만한 언행을 했을때 소셜 미디어에서 팔로우를 ‘취소’하거나 관련한 대상을 보이콧하는 문화 현상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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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마틴 루터 킹 2세과 앨버트 래비의 '시카고 자유운동'
출처 : FRANK HURLEY/NY DAILY NEWS ARCHIVE VIA GETTY IMAG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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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ay have no power, but the power I have is to ignore you.
내가 힘은 없을 수 있지만 당신을 무시할 힘은 있다.
- Anne Charity Hudley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대학 African America Linguistics 학장
(Vox 문화기자 Aja Romano와의 대화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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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캔슬 컬처는 흑인 문화에 뿌리를 둔 용어로 1950년대에서 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에서 쓰였습니다.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흑인 인권을 무시하거나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보이콧’이라는 행태를 이용한거죠.
이후 소셜 미디어 상에서 #BlackLivesMatter나 #MeToo 등 굵직한 사회 운동으로 연결되면서 차별받는 자들이 연대하고 싸우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논쟁거리'의 기준이 서로 다르고 소셜 미디어의 특성상 쉽게 불이 붙고 파편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과한 방향으로 캔슬 컬처가 변질됐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차단해버리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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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슬 컬처에 대한 논리나 찬반은 개인의 해석에 맡기고, 현상을 봅시다. 확실한 건 사회 전반에 PC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회변화에 긍정하는 움직임일 수도 있고 캔슬 컬처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문화, 특히 콘텐츠 시장은 PC를 빠르게 흡수했습니다. 넷플릭스만 봐도 알 수 있죠.
2020년에 나왔던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180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의상과 고풍스러운 건축도 볼만 했고 유치하지만 자극적인 스토리라인도 다음 화를 궁금하게 만들었죠. 무엇보다 예쁘고 잘생긴 주인공 간의 베드신이 야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분들이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점은 출연진의 절반 이상이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 등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샬롯 여왕은 흑인으로, 1800년대 영국에 어떻게 흑인이 여왕이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마치 그 당시 백인들의 원죄를 씻는 것처럼 흑인은 낮은 지위일 것이라는 편견을 지워줍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백인이 아니어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을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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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화이트 워싱(백인이 아닌 역할을 백인이 맡거나 백인처럼 표현하는 것)으로 비판받다가 배제되었던 흑인을 출연시키는 시도엔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사실 저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종을 다양화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브리저튼> 전반을 관통하는 사교계 문화는 그대로입니다. 여자는 청혼을 받는 데 목숨 걸고, 남자는 문란한 성생활을 해도 결혼하는 데 지장이 없는 시대적 배경은 바꾸지 않았죠. 특히 여주인공 다프네는 꽤나 전통적인 여성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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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여자 인생을 몰라. 오로지 결혼, 그 한 순간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기분 말이야. 난 그걸 위해 길러져 왔어. 이게 내 전부고, 유일한 가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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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가 무조건 결혼과 출산을 반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또 다프네 나름대로 스스로 결정하고 욕망을 긍정하는 등 성장하는 모습도 보이죠. 하지만 다인종을 배치하며 파격적으로 시각적 변화를 준 것과 달리 느낌을 주는 수준으로만 페미니즘을 다루는 모습이 어색했습니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보수적 여성관과 결혼관을 보고 있자니 선택적으로 PC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의아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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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마블 시리즈가 PC주의에 경도되어 망해간다고 주장합니다. 넷플릭스에 새로운 콘텐츠가 등장하면 블로그 리뷰엔 과도한 PC를 비판하는 글이 많습니다. 글쎄요, 저는 PC 자체가 작품을 망치는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PC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저절로 올바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Correcting, 수정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서 가장 중점이 되어야 할 부분은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나와 다름을 포용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이 참 간사해서, 내 집 안으로 초대할 때 더러운 신발을 신고 오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가진 것을 나눠먹으려고 하면 내 음식이 아깝습니다. 하지만 남들 보기에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우쭐한 기분이 듭니다. 알고보니 초대받은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곳에 온 것 같아 더 불편해하는데도 말이죠. 김지혜가 그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말했듯, 우리는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입니다. 모두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진심 어린 마음을 콘텐츠에 녹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브리저튼>에 흑인 배우들은 늘어났으나 백인 미국인 입장에서 구색 맞추기에 필요한 인물들은 아니었을지, 다양한 인종을 다룬다면서 동양인의 비중은 왜 낮은건지, 내내 결혼과 출산을 외치다가 범하려는 남자에게 직접 주먹 한 방을 먹이면 주체적인 여성이 되는건지, 의문이 가득합니다. PC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도 늘 조금씩 어딘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문제는 PC라는 단어를 무기로 삼는 우익 정치인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랬고("캔슬 컬처의 목적은 품위 있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해고되고, 망신당하며 사회에서 지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이탈리아의 총리 멜로니가 그랬듯이("PC와 LGBT를 단호히 거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극대화하는 캐치 프레이즈가 넘쳐납니다. 경제가 어려우니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벅찬데 다른 존재를 포용할 여유가 없습니다.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드는 PC가 짜증나고 거부감은 심해집니다. 아이러니한건 '정치적 올바름', PC의 반댓말이 '표현의 자유', Free Speech로 여겨지게 된 것이죠. 사실 모두의 '자유'를 위해 'PC'하자는 말인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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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박스오피스 순위 TOP 10
출처 : KOBIS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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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백래쉬, 반발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PC를 고려하지 않은 작품들이 나오고 '통쾌함'이라는 감상으로 소비되겠죠. 분명 세상은 더 '불편'해질테니까요. 2022년 박스오피스 순위를 보면 1위인 <범죄도시2>부터 <탑건 : 매버릭>, <한산 : 용의 출현>, <공조2 : 인터내셔날>, <헌트> 등 한 해동안 남성액션물 영화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OTT를 이용하더라도 영화관에서 봐야지만 웅장함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극장에서 우위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큰 사랑을 받은 <범죄도시2>의 경우 여성의 뚜렷한 존재 없이 본투비 남자들의 영화라, PC주의 넷플릭스와는 사뭇 다른 출연진이 눈에 띄네요. 게다가 다분히 폭력적이고 욕설이 가득한 영화라,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대신 이 영화에는 마동석의 싸대기가 스토리고 개연성이죠. 일상에서 켜켜이 쌓인 화를 한방에 풀어주는 콘텐츠, 더 많이 생기고 흥행할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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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야기했던 <재벌집 막내아들>을 다시 꺼내와봅니다. 인기 있는 이유 기억나시나요? PC하지 않아서.
PC라고 해서 꼭 '젠더'만을 이야기하고 싶은게 아닙니다. 이 드라마의 축은 재벌입니다. 표면상으로는 재벌집에서 '머슴일'을 하던 주인공이 그 집에서 다시 태어나 자신을 죽인 재벌에게 복수하는 내용이긴 하나 재벌이 나쁘게만 그려진다거나 주인공이 착하고 정의롭게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주인공인 진도준이 돈을 이용해 돈을 벌고 그 과정에서 서민들이 피해입는다는 겁니다. (스포가 될 수 있으니 뭉뚱그려 설명할게요) 서민이었던 주인공이 부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서민을 이용하는 설정은, 결국 주인공이 체제 전복이 아닌 왕좌를 점령하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사람들은 재벌과 부자를 증오하면서도 그들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 진도준이 복수가 끝나고 난 다음에도 계속 부자이길, 다 가지길 바랄겁니다. 가난을 혐오하고 부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드라마의 모습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리고 재벌집 사람들이 마치 정해진 배역인양 클리셰 속에 들어앉아 있는 모습에 안정감도 느낍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가족보다 돈입니다. 창업자는 꼬장꼬장하고 비정하게 돈만 밝혀도 존경심을 유발하고, 할머니는 남편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따뜻하게 손자들을 품어줍니다. 아들들은 권력을 위해 능력을 입증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딸은 히스테릭하고 철 없지만 아픈 아버지 때문에 눈물 흘리는 존재죠. 편견을 강화하다 못해 캐릭터화하는 드라마. 그래서 더 쉽게 느껴지고 자극적으로 재밌다는게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하는게 아니고 내가 꼭대기에 없어서 불만인거구나, 냉소적인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PC에 반발하는 심리에 대한 고민도 해봅니다. PC는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춰서도 안 됩니다. 세상은 더 좋은 쪽으로 변해야 하고 끊임없이 올바름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백래쉬도 계속 될겁니다. 더 많은 잡음과, 갈등과 스트레스가 있을겁니다. 세상 돌아가는게 원래 이럴까요? 이왕 싸움이 시작된 거, 각자가 옳다고 믿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봅시다. 대신 대화는 계속 합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헤겔의 '정(正)-반(反)-합(合)'처럼 결국 더 나은 합, 그보다 더 나은 합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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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잘 들리는 계절입니다. 차갑지만 청량한 공기는 밖에두고, 따뜻한 음악과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함께 하는 연말 보내시길 빌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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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by Zoe • 한새벽 • 구현모 • 후니 • 찬비 • 구운김 • 식스틴 • Fr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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