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손》, 지금 시대에 가족을 표현하는 방법
나나 “영화관에서 팝콘만 사러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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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에디터 나나입니다.
9월 추석 연휴가 쏜살같이 지나고 벌써 10월이 되었네요. 지난 휴일에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셨나요? 최근에는 제사가 점점 사라지고, 가족끼리 여행을 다녀오는 모습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저 또한 어린 시절 시골에서 상경했지만, 마지막으로 시골에 다녀온 지는 5년이 넘었습니다. 제사도 거의 사라졌고 하게 되더라도 어른들끼리 알아서 하시겠다며 부르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렇게 명절 가족 모임의 스트레스가 점차 남 일처럼 느껴지던 차에 영화 《장손》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레터는 영화 《장손》을 필두로, 미디어 속에서 드러나는 가족의 모습에 대해 되짚어 볼게요. *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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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뭉치면 살벌하고, 흩어지면 살만하다?
2. 우리의 세상은 이미 달라졌다
3. 당신의 ‘집안’은 안녕하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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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은 경상도의 한 시골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어느 대가족의 제삿날 모습을 그려냅니다. 가족의 구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대가족’ 그 자체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고모들과 누나 내외, 그리고 장손인 막내아들까지. 조용한 시골의 아름다운 고택이지만 남자들은 방 안에서 술을 마시고, 여자들은 제사 준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죠.
오랜만에 모인 이들은 제사 시간을 앞당기는 문제로 부딪히게 됩니다. 이렇게 살얼음판인 분위기에 서울에서 일하는 장손이 결국 ‘두부 공장을 잇고 싶지 않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말아요. 하지만, 이 가족에게 두부 공장 승계 문제는 그저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일 뿐 더 내밀한 문제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점점 드러나게 됩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차분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루한 현실의 나열로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대사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관찰력’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그려내는 가족 안에서의 차별과 갈등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을 만큼 세밀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생각보다 명백하게 가족 안에서의 차별에 대해 보여주기도 합니다. 임신한 누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전을 부치는 와중에도 일을 시키던 할머니가, 주인공이 등장하자 버선발로 맞으며 바로 에어컨을 틀어주는 모습이 물 흐르듯 묘사됩니다. 이후에도 ‘겪어봐서 아는’ 가족 간의 미묘한 감정선들이 지속되며 가족의 공고함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요. 그리고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그저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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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영화이다 보니 관객의 반응도 대체로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 건 저의 편견이었나 봅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많은 관객이 깔깔 웃기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거든요. 동시에 제 옆의 누군가는 ‘트라우마 도진다’고 혼잣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기도 했고요. 담담하게 흘러가지만, 누군가는 가족에게 받았던 상처를 되새기고 누군가에게는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으로 보이는 영화. 이런 반응의 차이조차 영화가 의도한 바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신예 오정민 감독은 《장손》이 장편영화 입봉작인데요. 대구에서 태어나 조부모님의 손에 자랐다는 그는 자전적인 경험에서 이 영화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다양성’과 ‘확장성’을 위해 많은 고민을 거쳤다고 해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려던 감독의 의도가 추석 시즌과 잘 맞아떨어졌는지, 지난 9월 11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9월 말 기준 관람객 수 2만 명을 돌파하며 올해 독립영화 흥행 순위 3위를 기록했다고 해요. 더불어 지난해 부산국제광고제 수상과 더불어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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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새삼 ‘대가족’이 등장하는 콘텐츠를 오랜만에 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가족’ 콘텐츠는 대부분 KBS에서 방영하는 주말 드라마거든요.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 고부갈등, 자녀 문제, 유산 상속 등등…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결국 결론은 언제나 ‘훈훈한 마무리’였습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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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도 지상파에서는 비슷한 구성의 ‘가족극’이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사실 요즘 세상에서 대가족은 옛말이 된 거나 다름없잖아요. 예전처럼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갈등이 생기기보다는 따로 사는 것이 더 보편적인 인식이 되어가고 있고요. 마침, 지난 레터였던 하은님의 ‘혼자 있는 시간, 좋아하시나요?’에서 언급된 것처럼 우리나라 1인 가구 수는 점점 증가세입니다.
통계청에서 실시하는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1인 가구의 비율은 2000년 15.5%에서 2023년 35.5%로 증가했다고 해요. 같은 기간 동안 4인 가구의 비율은 31.1%에서 13.3%로 감소했고요. 만약 20년 전이었다면, 《장손》의 주인공도 이미 혼자 서울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경하는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흩어진 가족’들도 어느 시점에는 모여서 만나야 하는 때가 옵니다. 1인 가구의 시대라고는 해도, 결혼식이나 제사, 장례식 등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모여야 하는 일들이 생기잖아요. 그래서인지 지난 9월 4일 개봉한 영화 《딸에 대하여》가 문득 떠올랐어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성소수자인 딸이 동성 연인과 함께 엄마의 집에 들어와 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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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엄마는 딸의 동성 연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해요. 부모가 언제든지 자녀의 성정체성을 바로 수용하고 자녀의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엄마는 딸의 연인을 불편하게 느끼며, 그녀를 두고 주변에 '그냥 친구'라고 얼버무립니다.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긍정하지도 못하고 혼란을 느끼는 모습이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느껴졌어요.
《딸에 대하여》는 지난 9월 대전여성영화제 상영을 앞두고 성소수자 등장을 이유로 대전광역시로부터 상영 철회를 요구받아 이슈가 된 작품이기도 한데요. 《장손》이 대가족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세대가 살아온 이야기’에 주목했다면, 《딸에 대하여》는 소수자의 모습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두 영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당연해졌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예전에는 TV에 나오던 가족들은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정상 가족’의 형태가 당연했던 시대였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태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방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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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의 오정민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가장 먼저 하고 지나가야 하는 이야기이자 꼭 내 첫 영화가 되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무슨 말인지 잘 공감이 되지 않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영화 속의 대가족은 일제강점기부터 민주화운동, 이후 현대까지 삼대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족의 모습은 현재, 우리 대부분의 가족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영화는 그래서 우리의 가족을 둘러싼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 조부모, 부모 세대가 어떤 상황에서 살아왔고 어떤 이유로 현재의 애증 어린 모습이 되었는지에 대해서요.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지만, 그 행동에 대해 ‘그땐 다 그랬다’는 식의 변명을 하거나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는 현실 인식의 출발인 영화라고 느꼈어요.
오늘 레터에서 다룬 《장손》과 《딸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해 다루는 지금 시대의 모든 콘텐츠가 사실 유의미한 ‘기록’입니다. 기록의 의의는 현실 반영 그 자체에도 있겠지만 동시에 공감과 위로를 주기도 하죠. 세상에 불화 한번 없었던 가족이 존재할까요. 가족이어서 행복하다면, 동시에 가족이기에 슬프고 힘들기도 하다는 것을 이 ‘기록’들이 모두 담아냅니다. 동성 연인과 함께하는 나를 거부하는 엄마의 반응, 장손이 아닌 내가 가족들 사이에서 터트리게 되는 울분까지도요.
현재에 대해 인지하고 그 다음을 향한 고민에 대한 발판이 되기에, 《장손》은 세심하면서도 한 켠으로는 냉정한, 하지만 동시에 냉소는 하지 않는 솔직한 영화였습니다. 한국 사회의 구성이 이미 많이 변했다고는 해도 아직 우리 인식이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그래도 부모님 하라는 대로 해야지’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잖아요. 어쩌면 지금 시점의 관객들에게 꼭 필요한 영화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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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보내며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가 얼마 전에 완결된 네이버 웹툰 《집이 없어》의 대사들이 한동안 마음에 밟혀, 몇몇 에피소드들을 여러 번 다시 정독했습니다. (지난 피드백 레터에서 찬비님이 추천한 작품이기도 해요)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자의 가족과 얽히면서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극복에 대해 정말 잘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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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할 것 없이, 가족은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가깝기에 가장 많이 상처 입힐 수 있는 존재가 되기도 해요. 그래서인지 가족에 대해 다루는 거의 모든 작품은 가족으로부터 받는 ‘상처’가 주된 소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해 나가게 되는지는 모두 다르게 접근하더라도요.
《집이 없어》는 그런 상처를 수용하고, 때로는 가족에서 벗어나는 것도 답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제시합니다. ‘가족과 화해해 보라’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확실히 다르죠. 앞으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또 어떤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족의 모습을 만나게 될까요. 혹은 우리가 알던 가족의 형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고요. 세상에 다양한 가족의 모습이 존재하듯, 우리의 가족에 대한 인식도 점점 바뀌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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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나나>의 코멘트
말도 안 되게 더운 9월이었어요. 올겨울은 다른 해보다 더 추워질 예정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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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업문의 augustletter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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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oe • 구현모 • 찬비 • 나나 • 오리진 • 하은 • 움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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