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저희 부모님은 제게 “다리에서 주워 왔지"라며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내 눈앞에 있는 이들이 부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 사실 내게는 엄청난 출생의 비밀이 숨어 있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잊혀졌습니다. 영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캐나다 출신 유명 감독이자 배우 중 한 명인 사라 폴리(그녀가 감독한 <위민 토킹>은 2022년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았고 영화 <새벽의 저주> 출연으로 유명해졌습니다.)가 자신의 출처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입니다.
감독에게는 생각지 못한 출생의 비밀이 하나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였던 것.
이야기는 이렇게 거슬러 올라갑니다. 빨간 머리로 태어난 사라 폴리,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빨간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들은 종종 사라에게 출생의 비밀이 있을 거란 농담을 건네곤 했죠. 빨간 머리는 시간이 지나며 이내 금발로 바뀌었지만 사라는 긴 시간 동안 이 의심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몇가지 정황들이 있기도 했죠. 형제로부터 들려오는 어머니에 관한 소문들. 배우 출신인 그녀의 어머니는 연극 출연을 위해 꽤 긴 시간 가족을 떠나 몬트리올 생활을 했었고, 이때 그녀에게 남자가 있었다는 소문. 바로 그 남자가 사라의 생물학적 아버지 일것이라는 추측은 십 대 사라가 풀어야 할 인생의 커다란 수수께끼였습니다.
영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감독 사라 폴리가 자신의 가족들, 어머니와 아버지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이 인터뷰를 교차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영화는 어린 사라 폴리를 두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 다이앤과 그녀의 남편이자 사라의 아버지인 마이클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제는 흰 머리의 주름이 성성한 노인 마이클은 사라의 요청에 따라 녹음부스로 들어섭니다. 마이클은 자신의 아내 다이앤에 관한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마이클과 다이앤은 연극 배우 출신이었고 다이앤은 마이클이 출연하는 연극을 보았고 마이클에 매료되게 되었습니다. 마이클은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도 합니다. 그녀가 매료된 것은 아마도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는 전혀 다른 연극의 캐릭터였던 것 같다고 말이죠. 둘은 이내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이앤과 마이클의 성격은 아주 달랐습니다. 유쾌한 활동가 다이앤과 조용한 사색가 마이클. 마이클은 돈벌이가 어려운 연극을 그만두었고 그런 마이클을 선택을 다이앤은 무척 아쉬워했죠. 시간이 지날수록 결혼생활은 권태로워졌습니다. 둘의 사랑도 점점 식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이앤은 몬트리올 극단으로부터 연극 제안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다이앤은 가족이 있는 토론토를 떠나 모트리올로 향했고 본래의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마이클도 다이앤의 이런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죠. 둘은 사랑에 다시 불씨가 붙었고, 토론토와 몬트리올을 오가는 정열적인 러브레터를 교환합니다.
그렇지만 이 러브레터가 오갔던 시기 다이앤은 마이클과 그녀의 자식들에게는 밝힐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을 떠난 몬트리올에서 그녀의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우연히 다이앤의 연극을 보러 온 해리. 그는 한 눈에 다이앤에 매료되었습니다. 해리는 인생에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랑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게 다이앤과 해리는 그녀가 몬트리올에 있는 내내 사랑을 나누게 되죠. 그렇게 다이앤은 해리의 자식을 임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다이앤이 몬트리올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이 있는 토론토로 돌아온 뒤 알게 됩니다. 다이앤은 낙태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영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의 감독 사라 폴리는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한 편의 아침 드라마 같기도 한 이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녀의 어머니 다이앤의 궤적을 쫓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증언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녀의 주변 인물의 증언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특히 그녀의 남편 마이클이 이 사건을 겪으며 작성한 일종의 회고록을 기둥 삼아 사라 폴리의 형제들 다이앤의 친구들 그리고 그녀의 애인이자 감독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해리가 등장합니다.
🎬 다큐멘터리는 객관적 진실을 담고있을까?
영화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감독 사라 폴리의 출처와 연관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각자가 입장을 통해 전개됩니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Stories We Tell>로 각자의 개별적인 입장의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영화가 만들어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면에서는 때때로 감독의 질문이 들리기도 합니다. 감독은 이들에게 기억 남는 세세한 것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하도록 유도하죠. 때때로 이들의 증언은 어긋나기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야기란 그런 것입니다. 각자에게 다가온 세상과 사건은 개개인의 입으로 발화될 때에 또 하나의 단독적인 이야기를 생성합니다.
그렇기에 영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감독 사라 폴리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말미 다이앤의 남편이자 감독 사라 폴리를 키운 아버지 마이클은 감독에게 이런 말을 건넵니다. 너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 중 일부를 드러낼 것이고 어떤 것을 쓸 것인지 선택할 것이라고 말이죠.
우리는 여기서 다큐멘터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때로 객관적 진실이라고 이야기되는 다큐멘터리는 정녕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진실을 담고있는 것일까요? 역사적 흐름과 맥락 속에서 발화되는 이야기를 진실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감독의 열망과 노력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겨울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몇 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루카 구아다니노 <I Am Love>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겨울의 풍경을 포착합니다. <Call Me By Your Name>의 감독인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이탈리아 3부작 중 첫 번째 영화인 <I Am Love>를 겨울이 시작되는 지금 추천드립니다.